Vision Weekly News
32 ivisionmagazine.com FRI. 15. OCT 945 사실 베토벤 역시 당대 음악 가들에게 가장 좋은 일자리 였던 비엔나의 궁정음악가 자리를 계속 노리고는 있었 다. 하지만 인생은 타이밍이 다. 베토벤이 작곡가로서 전 성기를 구가할 무렵, 전 유럽 을호령하던신성로마제국이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해체 의길에들어섰다. 혼돈의 세월을 보낸 끝에 유 럽의 질서가 다시 재편되며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 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간판을 바꿔달며 비엔나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런데 베 토벤은 하필 딱 이때 청력을 상실하며 새로운 제국의 궁 정음악가가 될 기회가 날아 갔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베 토벤은 때 마침 도래한 시민 사회가 원하는 웅장한 교향 곡과낭만주의비르투오소들 이기량을뽐낼수있는협주 곡을 잇달아 작곡하여 독립 음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고전파와낭만주의를이어주 는 베토벤은 하이든이 시작 한 교향곡을 완성한 작곡가 이기도했지만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알리는 수많은 협주 곡들을작곡하기도하였다. 음악적 성취에 더해 귀족들 과의 수많은 일화에 등장하 는 자기애를 보면 베토벤이 야말로 교회의 권위를 높이 거나 절대왕정을 과시하는 음악의 과거 목적에서 벗어 나 음악가를 음악의 주인으 로 삼는 인식론적 음악의 진 정한 화신으로 불러도 과언 이아니지아닐까한다. 그리고보니비엔나와관련된 베토벤 이야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 공작과의 유명 한 사연이 있다. 비엔나의 어 느 공작에게 모욕을 당한 베 토벤이 ‘공작은 당신 말고도 많지만 베토벤은 지금까지 도, 앞으로도 나 하나뿐이오’ 라는 편지를 남기고 이 후원 자를 떠났다는 것이다. 악성 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하인취급하는 귀족들의 속 물스러움에대한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건 정말 공작 말 도들어봐야한다. 베토벤의 편지 한장으로 역 사에길이남게된이공작은 리히노프스키 공작이었다. 이 양반의 영지는 원래 지금 의 체코쯤에 있었는데 당시 의 많은 영주들처럼 자신의 영지는 대리인시켜 소작료 나 받고 본인과 가족들은 당 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인 비 엔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 마도 현실적인 이유와 문화 적인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을것이다. 당시에 공작이라고 하면 대 충 경상도나 전라도쯤 되는 면적을 다스리는 영주로 국 가별로 몇 명되지 않는 핵심 귀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 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 해 자신의 영지에서 대장 노 릇하기 보다는 왕의 측근이 되어 권력의 핵심 근처에 머 무는것을택했다. 루이14세 의 절대왕정이 시작되자 프 랑스의 공작과 백작들이 베 르사이유로몰려와연체동물 로 변했듯이 동유럽의 귀족 들은비엔나로몰려갔다. 여기에 더해 수도에서의 사 교생활에 한번 맛을 들리면 시골로 돌아가 농민들 틈에 서 골목대장 노릇하는 것은 아무 의미없게 느껴졌을 것 이다. 궁궐 정치의 암투에 지 친 아빠가 낙향을 선언해도 비엔나 궁정 무도회장에서 황태자와 춤출 기회만 호시 탐탐 노리는 딸내미와 엄마 가따라갈리만무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이런 사교계에서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공작이라는 타이 틀에 걸맞게 예술 애호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독립음 악가로성공했다고는하지만 공무원인왕실음악가에비해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음악 자영업자 베토벤 역시 이 분 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후원 에 대한 보답으로 베토벤은 교향곡2번을비롯해여러곡 의 소나타를 이분에게 헌정 하기도했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이 분 은 이렇게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만 남기며 행복하게 살 다 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수 많은 왕과 영주들이 끊임없 이 세력다툼을 하던 근대 이 전의 유럽에서 평화로운 시 기가 얼마나 있었을까? 당시 에 공작쯤 되는 타이틀을 달 았다면 평생 왕의 눈치를 보 고 주변 영주들과 세력다툼 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잘못하면 영지를 잃는 정도 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이 위태로웠으니 말이 다. 언젠가 친구집에 놀러갔다 가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전 공한 친구 와이프와 이런 대 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애가 둘인 이분이 얼마전 혼자 리 스본에한달간다녀오셨다고 한다. 갑자기왠리스본?하고 물어보니 리스본에 사는 친 구 하나가 휴가를 가면서 친 구들보고 빈집에 와서 놀라 고했다는것이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동 창들이 간만에 모여 의기투 합을 한다는데 남편한테 애 둘 맡겨 놓고 한달 씩 포르 투갈에 가 있을 핑계로 이거 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아 무튼 리스본 어땠냐는 의례 적인 질문에 신선한 답이 돌 아왔다. “현철씨있쟎아, 리스본이유 럽에서 제일 서쪽 끝이쟎아. 프랑스나오스트리아에서보 면 제일 변방이지. 그래서 역 사적으로권력다툼에서밀려 나 목숨만 간신히 부지한 왕 족 귀족들이 금붙이 싸들고 리스본으로 모여들었거든. 그러니까리스본은수백년간 돈은 넘쳐나고 할 일은 없는 왕자 공주들이 모여살던 곳 이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뭐 하면서 남은 삶을 보냈겠어? 마음 비우고 인생즐기다 가 는거지. 그래서 그런지 리스 본에는 아직도 나른한 향락 문화가 남아있어. 그 분위기 가있어,아직도.“ 리히노프스키공작이베토벤 과 음악적 교류를 하던 당시 는 리스본 길거리에서 공주 님 하고 부르면 지나가던 아 줌마들이 돌아볼 정도로 고 향에서 쫓겨난 왕자와 공주 들이 넘쳐나는 격동의 시기 였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천 년을 이어온 교황의 권력이 쇠퇴하고절대왕정이등장하 게 되었다면, 프랑스 대혁명 에 이어 나폴레옹 전쟁이 일 어난 당시는 그 절대왕정이 무너지고시민혁명이일어나 는시기였다. 콕집어말하자면리히노프스 키 가문의 기반이 된 신성로 마제국이나폴레옹의말발굽 아래 무너져 내렸다. 목이 날 아간 루이 16세를 보고 경악 한 유럽 각국의 왕들이 힘을 모아 간신히 나폴레옹을 몰 아내었지만, 원래가 느슨한 연합체였던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이 후 멀리 뚝 떨어진 스페인 등이 제국에서 빠지면서 오스트 리아-헝가리 제국이 신성로 마제국을이어받았다. 수백 년 지나고 나니 이렇게 간단히 한줄 요약이 가능하 지만 당시를 사는 사람들에 게는한치앞도내다볼수없 는 격변의 시기였다. 신성로 마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 리아 제국이 들어섰다지만 그 중간에 라인동맹이니 하 는 단명한 체제들이 등장했 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이 와중에 줄 한번 잘못 섰다가 리스본으로야반도주하는귀 족들이 속출한 것은 당연지 사였다. 이런 시기에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편하게 잠을 잔 밤이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뜬눈 으로지샌밤이더많았을당 시의 권력가들에게 음악이 하나의 위안이 되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의 집에 식객으 로있는 (단칸방에살던베토 벤은 리히노프스키 공작 집 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했다) 음악가들의상처받은영혼까 지 달래주러 다니기에는 스 스로가 짊어진 시대의 무게 가너무컸을것이다. 리히노프스키공작이베토벤 을 모욕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엔나를 점령한 프랑 스 군을 위해 연주를 해달라 고 부탁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결국 나폴레옹이패배했다는것이 베토벤과 리히노프스키공작 by조현철 억울하게속물이된공작 비엔나에와서미술도좋지만 음악이야기를빼놓을수있을까. 모차르트와함께비엔나뿐아니라고전음악을대표하는 베토벤은고용주의비위에맞추어작곡을해야했던 선대음악가들과는달리어느군주에게도종속되지않은 자유로운영혼을가진최초의음악가로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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