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하고모임을시작했다. 첫모임은단출하게 3명이
모였다. 친구하나와여동생. 시작은미약했지만이모
임은오늘날세계에불을밝히는‘횃불’의발화점이었
다(횃불회소개는문답참고).
횃불회의사역이점점확장되고커지면서기존의한
남동회관이협소했다. 더넓은회관이절실했다. 일은
엉뚱하게(?) 풀렸다.
“어느날,남편이‘청와대경호실에서전화가왔는데,
도로땅을가져가라고하더군’해요. 현재횃불회관자
리인그땅이었다. 전두환대통령은퇴임후사저를짓
겠다고그땅을헐값에강탈해가다시피했다. 통치말
기에 그 땅을 다 정비해놓고 5공 비리에 관련되자 그
땅을다시팔겠다고연락한것입니다.
결국팔때보다세배를더주고사왔지요. 그땅을찾
자남편에게그동안횃불회관을지으려고안쓰고저축
했던정성이담긴돈을건넸습니다. 그랬더니그액수
만큼인 3백평만가지라는것입니다. 저는그말이못
마땅했지요, 아무말도안하니일주일후에는 5백평
으로, 그래도반응이없자, 나중에 1천평을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반응을 안보이자 남편이 불쑥
‘욕심쟁이’라고내뱉더군요.
부모 형제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욕심쟁이’란
말을남편에게서들었습니다. 그제서야남편은백기를
들고‘당신그땅3,800평다가져요’하더군요.그때제
입에서‘할렐루야!’라는말이나왔습니다.”
1991년 10월 30일 횃불회관 준공식 때 필자도 참석
했다. 그날이권사는트리니티대학에서명예문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이후 횃불회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사
역을펼쳐갔다. 특히횃불전액장학금으로한국의주
요 교단 신학교 교수 150명 넘게 배출한 것과 횃불트
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신학계에
크게이바지한것이다.
그리고이들부부에게서빼놓을수없는것이할렐루
야교회창립과섬김이다.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기념예배당을 지어드리
려대치동에정사각형테니스장을봉헌했습니다. 나날
이부흥하여1천여명되는교회로성장했는데, 갑자기
이종윤목사님이충현교회로가시고김상복목사님이
오셔서 교인들이 더욱 많이 늘었습니다. 자리가 비좁
아양재동횃불회관으로잠시옮겨 3, 4년후분당으로
이사하게되었습니다.
원래그자리가종교부지로불교조계종이들어갈자
리였습니다. 그런데그들이안사겠다고하여할렐루야
교회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산을 하나 샀는데 비싸
지도않고, 온성도들이기쁜마음으로헌금하여건축
하는 도중 IMF가 왔습니다. 3,4년 동안 아래층만 짓
고, 체육관에서예배를드렸습니다.
김목사님정년퇴임전에교회완공할예정으로진행
했는데, 마침남편이감옥에서잠깐나왔을때, 건축위
원장하고 준공한 다음 감옥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 사면되어 나와 김승욱 목사님을 모
셔왔습니다.”
질곡의 세월
그렇게 기도로 낳고, 기도로 세운 63빌딩을 18년을
지켜왔는데, 정치자금을 주지 않고, 보수파라는 몇몇
이유로정치적인희생양이되어빼앗기고말았다.
“김대중전대통령이그것을빼앗아갔습니다. 우리
의빌딩, 22개의회사, 집까지다빼앗아갔습니다. 이
것은 정치적으로 된 사건인데, 김 전 대통령이‘내가
그것을빼앗으라고했다’고생생하게녹화된비디오도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민감
한사항에대하여입조심을합니다.
남편은 다니엘처럼 하나님이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하나님만믿고, 하나님이기적을일으키시기를바랍니
다. 기적의하나님께서는‘반드시찾아줄것이다. 걱정
하지마. 이미찾은것이나마찬가지이니이미너희것
이니마음놓으라’고말씀하셨습니다.”
이런숨막힐듯이돌아가는소용돌이속에터져나온
것이 유명한‘옷로비 사건’이다. 엄격한 용어로 말하
면‘명품옷값대납거부사건’이다.
“그날이최장로생일이라, 우리집에서제부하용조
목사 부부와 저희 부부가 있을 때 옷가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검창총장부인을비롯한고위인사부인들이
명품옷을가져가고저에게옷값을받으라고한것이예
요. 한두푼도아니고자그만치 1억이넘는돈이에요.
‘무슨그런일이있느냐? 못내겠다. 나는모르는일이
다’했지요.
감히검찰총장부인의요구를거절했다고일을뒤집
커·버·스·토·리
횃불재단 이사장 이형자 권사
30
Christian Review
크리스찬리뷰
15
▲2006년 3월
대통령배 전국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할렐루야 축구
단. 할렐루야 축
구단은 1980년
창단됐다.